하현숙 논설위원
나쁜 짓을 하고도 죄가 없는 양 요리조리 뺀질뺀질 잘 빠져나가는 치사한 인간을 비유할 때 미꾸라지 같다고 한다.
못된 짓을 하고도 낯이 두껍고 뻔뻔하여 주변 시람을 힘들 게 하는 사람에겐 미꾸라지 한 마리가 물을 흐린다는 표현을 쓴다.
요즘 인간미꾸라지들의 유전자 변형은 빛의 속도, 광년을 능가한다. 그러나 천적은 있게 마련이다.
미꾸라지를 잡을 땐 촘촘하고 부드럽되 제아무리 머리 디밀고 후벼 파도 제 머리가 닳을지언정 구멍이라고는 뚫리지 않는 끈질긴 투망을 쓴다. 미투걸인(미꾸라지 투망에 걸릴 인간들)까지 모조리 잡을 수 있는 소셜네트워크가 그것이다.
소셜네트워크의 파급력은 가공할 위력이다. 득과 실의 공존은 이치라 해도, 아무렇지 않게 참과 거짓을 연출 조작하여 누군가는 영웅이 되고, 누군가는 영원한 패배자로 이름 석 자에 오명을 덧씌우기도 한다.
아무리 소셜네트워크의 위력이 사람을 죽이고 살리는 매가톤급 파괴력을 지닌다 해도 사후에 이름이 남는 일은 온전히 죽은 자의 몫이다.
박원순 서울시장이 자살로 생을 마감했다. 시장을 재임하는 동안 본인의 비서를 지속적으로 성추행 의혹 혐의로 고소당한 그의 죽음을 놓고 대한민국은 불편하게도 이념의 양분화로 갈라졌다.
보수와 진보의 이념을 앞세워 병들고 퇴락하는 정치권의 막장을 보이고 있다. 어떻게 똥인지 된장인지 찍어 먹어 봐야 맛을 안단 말인가.
당장의 현안은 뒷전이고 자살로 생을 마감한 그의 치적을 부풀리느라 생전 보지도 듣지도 알지도 못한 “피해호소인”이라는 신조어를 만든 충신까지 배출했다.
물론 박원순의 죽음은 슬픈 일이다. 이 세상 그 어느 누구의 죽음이 슬프지 아니한가. 그의 치적 또한 대한민국 국민이라면 다수가 칭송한다. 그러나 그의 치적에 성추행 의혹 사건을 희석해서는 안 될 일이다. 그의 죽음은 석연치 않다.
명쾌한 결론도 없다. 그의 자살은 사회적 양분화만 부추겼을 뿐이다. 죽은 자는 말이 없다. 그래서 더욱 피해자의 입장이 안타깝다.
피해자의 삶을 생각해 보라. 권력권자들의 고질적 만행에 시달리는 그 누군가가 내 가족일 수도 있다는 현실에 닥쳤을 때, 가해자의 죽음을 애도하며 용서라는 알량한 선심이 가슴에서 우러나올지 말이다.
이념과 진영 논리를 앞세우기 이전에 참과 거짓과 죄는 분명히 밝혀져야 한다.
성범죄에는 면죄부가 있을 수 없다. 가해자가 사망해서 공소권 없음을 이유로 죄가 묻혀서는 더더욱 안 될 일이다. 세상에 죽어야 마땅한 사람, 당해야 마땅한 사람은 없다. 수많은 성범죄 피해자들이 박원순의 죽음에 대한 결론을 지켜보고 있다.
만일 박원순이 살아있다면 본인의 범죄를 인정했을까. 아마도 인정하고 싶어도 정치권의 압력에 죽느니만 못했을 것이다. 반대로 죄가 없다고 무죄 판결이 났다손 치더라도 괴로움에 치를 떨며 지켜보는 피해자를 수수방관 하자니 차라리 죽음을 선택했을 것이다.
죄를 짓지 않았다면 죽고 살 일이 아니다. 박원순의 죽음이 대중적 분열의 중심에 있는 이때에 소셜네트워크의 역할에 균형이 실릴지 궁금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