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현숙 논설위원
아버지, 오늘은 9월 30일이고 아침 아홉 시 십오 분이야
공기도 하늘도 다 새파랗고 이쁘네
근데 건너편 건물 저기
헬스클럽엔 왜 저렇게 사람들이 많지?
아마 저 사람들은 아침에 출근을 안 하는 모양이야
창문에 비친 아버지의 몸은 미동도 않지만
병실의 회벽 속으로 가을이 스미는 것쯤은 당신도 안다
딸의 독백 아닌 독백이 무엇을 의미하는 지도 다 안다
능숙하게 침대의 반을 접어 올리는
딸, 바라보는 아버지의 동공이
잔뜩 겁먹은 어린아이의 그것처럼 파르르 떤다
수액이 말라붙어 허옇게 분이 일어나는 육신은
당신의 뼈 마디마디 연골 사라진 금속성 소리에도 소스라친다
새파란 하늘이 아버지의 핏기 없는 얼굴에 길게 눕는다
목욕하고 면도할 시간이다
콧날보다 높이 솟은 광대뼈는
이미 바람에게 자리를 내어준 지 오래
아버지, 볼에 바람 넣어야지, 오른쪽 왼쪽
뇌 속의 아우성 같은 거품을 밀어내는 면도날이 민첩하다
아버지의 꼭 감은 속눈썹이 흥건히 젖는다
아버지, 현주소가 어떻게 돼?
황해도 송화군 진풍면 학계리 544번지
잘 했어 아버지, 우리 아버지 기억력 참 좋네?
뇌가 엉키고 짓뭉개진 지 만 삼 년, 기저귀를 찬
노구의 당신은 20대 청년의 기억으로 산다
땅덩어리가 잘리듯 동강난 기억 속엔 6.25가 없다
다만, 날마다 고향집에서 눈을 뜨고 잠을 청하고픈
그리움으로 반세기를 거슬러 오르는 꿈을 꾸시나 보다
아버지는 근 삼 년 동안 깊은 잠을 이룬 적이 없다
오늘은 하늘이 멍처럼 푸르다
아버지의 잠이 깊고 길어진다
오늘 밤엔 아버지가 좋아하는 노래
‘애수의 소야곡’을 스무 번은 불러야겠다
밤사이 혈관이 마르고 심장이 쉬어 가기를 여러 번
아버지의 얼굴엔 미소만이 가득하다
딸의 손을 성글게 쥔 하얀 손가락 사이로
아버지의 체온이 서서히 뺘져나간다
예들아, 내 떠남을 슬퍼하지 마라
백색의 수의를 서러워 마라
아버지에겐 날개를 다는 일이다
송홧가루 날리는 고향 동산 소나무 숲에서 학처럼 훨훨
날아다닐 수 있게 되어 다행이라 생각해라, 고맙다
죽음보다 더 지독했던 그리움, 갈 수 없는 고향
차라리 미쳐버리거나 미칠 만큼의 아픈 기억을
뼛속 깊이 골수처럼 지니고 살다가
그 끈을 놓아버렸을 임종 하루 전날의 아버지
당신의 여든 네 해 시월 초하룻날 아침 일곱 시.
황해도 송화군 진풍면 학계리 544번지에서
청년의 생을 다 하셨다
오늘도 하늘은 멍처럼 푸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