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영훈 국민서관(주) 콘텐츠기획본부장
정원에서 자라나는 풀들의 성장은 두 뼘을 넘지 못합니다.
두 뼘 이상 자라면 어김없이 돌아가는 예초기의 칼날에 속절없이 베어지기 일쑤입니다.
그러니 그들의 생육은 두 뼘이 한계라 할 수 있습니다.
그들은 그렇게 운명지어졌습니다.
생존을 위해 척박한 환경에서 처절하게 몸부림을 쳐야 할 운명과 맞바꾼 대가입니다.
대신에 생육이 거세당했습니다.
마치 동물원의 우리에 갇힌 백수의 제왕과도 같은 운명입니다.
사냥의 수고를 던 대신에 자유를 잃은 위엄과도 같습니다.
울타리의 창살 밖으로는 단 두 뼘도 나갈 수 없는 동물원의 사자는 철저하게 위엄을 거세당했습니다.
안주하려는 삶을 통해 얻는 것은 무엇이고,
그걸 얻는 대신에 거세당하는 것은 또 무엇일까요?
애초에 포기한 생육과 단 한 번도 가진 적 없었던 위엄이라면 거세의 아픔조차 느끼지 못하겠지만 우리의 본성은 안주와 나태가 아니었습니다.
정원의 두 뼘 남짓한 풀과는 달라야 합니다.
던져주는 고깃덩어리로 배를 채우는 눈곱 잔뜩 낀 동물원의 사자와도 달라야 합니다.
만약에 거울에 비친 자신의 모습에서 생육과 위엄을 발견할 수 없다면 과감하게 발걸음을 대딛어야 할 때입니다.
자화상 속 얼굴이 영원히 웃음을 잃지 않도록 용기를 내야 할 때입니다.
가끔씩 제게 묻곤 합니다.
‘거울에 비친 네 자화상을 보았을 때, 활짝 웃고 있는 모습이더냐? 아니면 잔뜩 일그러진 모습이더냐?’
웃음을 잃지 않기를 소망합니다.
거울을 들여다보는 일에 두려움이 생기지 않기를 기도합니다.
당신에게도 묻고 싶습니다.
당신의 자화상은 오늘도 웃고 있습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