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인연 파주시의회 의원
1945년 광복 이후의 시기는 『일제 잔재 청산』과 『농지분배』등의 문제로 이데올로기와 사상적 대립이 극에 달했던 시기이며 이를 기화(奇貨)로….
김일성은 북한지역을 공산화시키고, 인민군에게 ‘이념이 민족의 피보다 중요하다’는 사상교육으로 무장시키고 정예 빨치산 부대를 앞세워 1950년 6월 25일 기습남침을 감행하여 무고한 양민을 무참히 학살하는 등 동족상잔의 비극이 그들로부터 시작됐다.
정전(停戰) 상태인 지금도 무장공비 침투, 민간항공기 테러, 천안함 폭침, 연평도 포격, 제2 연평해전, 1사단 DMZ목함지뢰 사건 등의 끊임없는 무력도발로 무고한 대한민국 국민과 젊은이들의 생명을 앗아가고 있다.
그러나 6·25 전쟁은 민주주의와 사회주의의 양대 이념 세력을 대변하는 대리전쟁이 한반도에서 일어난 비극적 사건으로 『노근리사건』, 『거창 및 산청·함양사건』, 등의 남한 주민들이 국군과 미군에 의해 집단으로 희생된 사건도 있었다.
또한 전쟁 기간 중 남한의 경우 96만5990명의 민간인이 목숨을 잃거나 부상을 입었고 북한군과 공산주의자에 의한 12만2799명의 주민 학살이 있었으며 생사를 확인할 수 없는 8만2959명의 무고한 남한주민이 북으로 납치된 사실이 있었음을 우리는 오늘날에도 잊지 말아야 한다.
주민 학살의 대부분은 남한지역을 북한군이 점령하고 있는 동안 인민재판의 ‘반동계급’ 몰려 무자비한 방법인 죽창, 낫 등에 의해 처형당한 억울한 희생이었다.
이와 관련하여 저는 지난해 4월 23일 『역사를 외면하면 반드시 불행은 반복된다』란 주제의 시정 질문을 통해 파주시 파평면 두포리 산39번지 『6.25피학살현장(被虐殺現場)』 위령비 비문의 내용을 아래와 같이 소개한바가 있다.
“이곳은 1950년 9월 하순 반공인사 수백 명이 집단학살당한 현장입니다.
인천 상륙작전에 이은 서울수복으로 패주 하던 북한 공산도당은 이곳에 이르러 납치해 가던 반공인사들과 마을 주민들에게 무차별 총격을 가해 학살했습니다.
이 지역 일대는 형체조차 알아볼 수 없는 시체가 즐비했고 산과 들은 온통 피로 얼룩져 있었습니다. 죄 없이 죽어간 혼백은 말이 없고 시신은 한 줌 흙이 되었을 뿐 학살의 현장이었던 이곳은 가꾸는 이 없는 폐허로 남아 잡초만 무성히 자라고 있습니다.
이에 6.25 동란 35주년을 맞아 역사의 소용돌이 속에서 희생된 영령들을 추모하고 피 흘림 없는 조국통일을 기원하면서 ○○방송공사는 삼가 이 비를 세웁니다.
1985년 6월 25일
이 위령비가 건립 된지 올해로 또 35년이 됐다. 최근 6·25 전쟁 69년 만에 당시 참혹했던 그 학살현장의 영상자료가 생생하게 공개됐다.
따라서 당시 실상을 제대로 알 수 없었던 유족들의 ‘평생의 恨’을 조금이나마 풀어 드릴 수 있도록 현장 발굴조사 및 기록화 작업 촉구 결의안을 발의하겠다고 2019년 12월 29일 경기일보에 밝힌 바가 있어, 문헌에서 6·25 전쟁의 학살피해자 현황 자료를 찾아보았다.
표와 같이 『大韓民國統計年鑑 創刊號』, 六·二五 動亂被害, 1952年, p.321~2 책에 전국에 12만2799명의 민간인 학살이 자행되었고 경기도에는 7202명이 학살피해자가 있다고 적시하고 있지만, 2019년 4월 23일 임시회 조인연 의원 시정 질문에 대한 파주시장 답변의 최초 근거인
『京畿道誌 中卷』, 人命被害狀況, 1956年, p.300~1을 보면 『大韓民國統計年鑑』에는 학살피해자가 누락되어 있음을 확인할 수 있어, 경기도 내 7202명의 학살 피해자에 대한 현황파악이 필요하다 생각된다.
하여, 이념의 좌·우를 떠나 파주 주민 학살의 역사적 실체를 밝히기 위한 관련 문헌조사와 자료조사의 필요성을 제기하고자 한다.
아직 6·25전쟁을 몸으로 경험한 세대가 생존해 계실 때 파주시 주민 학살 현장의 전수조사와 유해 발굴이 조속히 이뤄져 정확한 희생자를 파악하고 평화공원화 및 추모사업 등을 통해 다시는 이 땅에 동족상잔의 비극이 발생하지 않도록 역사 교육의 장이 조성되길 기원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