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현숙 본지 논설위원
뫼비우스 띠를 형태학적으로 굳이 설명하자면 선 같은 면으로 이루어져 있으며, 처음과 끝의 구별이 쉽지 않게 한 번 꼬여있는 폐곡선 형태의 띠를 말한다.
뫼비우스 띠는 어느 지점에서나 띠의 중심을 따라 이동하면 출발한 곳과 정반대의 면에 도달한다. 그러나 계속 나아가 두 바퀴를 돌면 처음 위치로 돌아오는 특성이 있다.
다시 말해, 출발점과 도착점이 영원히 만나지 않을 것 같지만 두 바퀴를 도는 과정에서 처음과 끝이 합일치하는 연속성을 지닌다. 인간관계도 마찬가지다.
인간관계의 근원은 모태로부터 시작한다. 부모자식, 형제자매, 너와 나, 가족이라는 울타리 안에서 이루어지는 가장 가까운 혈통관계로서 이미 포괄적 사회성을 내포하고 있다. 가족이라는 작은 관계는 점차 사회적 관계로 옮아간다.
사회는 대중이 모이는 곳이다. 그야말로 변화무쌍하다. 익숙한 동질감 보다는 낯선 불편함이 더 많다. 무시로 새로운 관계적 상황이 초래할 당혹감을 극복해야 한다.
한국사회엔 나이를 따지는 문화가 있다. 동기간, 선후배, 형과 아우. 자연스러운 흐름이 사회로 나아갈수록 위계질서로 바뀐다. 아무도 왜 그러는지 묻지 않는다. 사회적 현상이며 관습이자 문화라는 말이 가장 적절할 듯하다.
그러나 나이에서 오는 불평등은 적응하기 쉽지 않다. 특히 사회적 관계로 맺어진 한두 살 차이 형과 아우는 친밀감이 끈끈할수록 평등한 관계를 기대하기 어렵다. 이러한 사회적 관계는 수직적 문화로 이어진다. 문화라고 표현해야 보편성에 묻혀 억울하지 않을 것 같아서다.
왜냐하면 가족이나 직장에서의 형과 아우, 선후배는 서로 호칭을 유지할 때 문제와 문제의 일반성을 나누어 공감하는 능력을 발휘하기 때문이다. 단, 위계적 관계를 동반하지 않아야 한다.
자연스레 바뀌는 사회적 관계를 바르게 인식하지 못하는 사람은 타인을 향한 편견과 증오와 배척이 강하다. 조직에서의 수직관계를 견디지 못할 뿐 아니라, 직장동료들을 살해하는 극단적인 비극을 초래하기도 한다.
물론, 한때 모방범죄의 근원이었던 희대의 사건을 시대적 흐름으로 보기엔 무리가 따른다. 말할 것도 없이 범법자는 누구고, 피해자는 누구라고 이분법적으로 흑백은 가려진다. 그러나 이 사회의 구성원이라면 누구나 피해자요, 범법자요, 방관자다. 다만 나와 상관없다는 비굴논리로 묵인할 뿐이다.
인내와 포용을 손해라 치부하는 잘못된 우월주의가 빚어낸 어두운 경쟁사회의 단면이라 할 수 있다. 사회적 관계에서 따돌림을 당하는 소위 ‘왕따’를 만들어 내는 가해자들이 과연 사회적으로 원만한 관계의 중심에 있는지도 의문이다. 관계는 상대적이며 부메랑이다.
인간관계란 한 번의 꼬임으로 영원히 안 보고, 안 만날 것 같아도 뫼비우스 띠처럼 연속성이 진리이다. 이 세상에 다시 안 볼 사람은 없다. 죽어도 보지 않겠다는 말도 거짓이다.
오늘 하루를 상상해 보라. 우리에게 얼마나 많은 만남이 이루어질지. 또 얼마나 많은 성과가 이루어질지. 까마득히 잊고 지낸 사람으로부터 짧은 문자 한 통이 날아와 준다면 그 얼마나 기쁜 삶인가. 죽을 때까지 보고 싶지 않은 사람에게 먼저 건네는 안부전화 한 통은 또 얼마나 큰 포용인가. 인연 끊는다는 말 함부로 하지 말자. 인간관계는 끊임없이 지속 순환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