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윤희 논설위원
교하 다율리 옛 청석골 마을. 마을 뒷산 양지바른 곳에 조선중기 종성부사를 지내고 이조판서에 추증된 고죽 최경창과 그의 부인 선산임씨와의 합장묘가 자리잡고 있다.
그런데, 이들 부부의 합장묘 바로 아래에 조선시대 함경도 홍원 출신의 기생이었던 홍랑의 무덤이 있다. 홍랑은 기생의 신분이지만 우리들에게 시인으로도 알려져 있는 인물이다.
본래 이 곳의 무덤들은 파주시 월롱면 영태리 다락고개에 있었는데 미군부대가 들어서면서 주변 토지가 모두 징발되는 바람에 1969년 6월 12일 지금의 장소로 이장하게 되었다.
그러면 어떻게 엄격한 신분사회였던 조선시대 사대부 묘 아래에 기생의 무덤이 있게 된 것일까? 그리고, 기생 홍랑은 해주최씨 집안과 어떠한 연(緣)이 있길래 이 곳에 무덤을 쓰게 되었을까?
한 시대를 풍미했던 천재 시인 고죽 최경창과 천한 신분의 기생이었던 홍랑. 이 두 사람 사이에는 조선판 최고의 러브스토리가 전해지고 있다. 해주최씨 집안에는 최경창과 기생 홍랑의 첫 만남이 전해져 내려온다.
때는 1573년 가을, 선조 재위 6년의 일이다. 당시 최경창은 북도평사가 되어 함경도 경성으로 부임하고 있었다. 북도평사는 함경도 병마사(兵馬使)의 보좌관 자리였다.
부임 도중 홍원군수가 최경창의 벼슬길을 축하하는 잔치를 베푸는 자리에서 두 사람은 처음 만난다. 한 기생의 창이 끝나고 홍원군수가 다음으로 홍랑을 지목했는데, 지목을 받은 홍랑이 “저는 노래보다 시를 더 좋아합니다.” 라고 말했다. 그러자 최경창은 “누구의 시를 좋아하느냐?” 라고 묻자 홍랑은 “고죽 선생님의 시를 좋아합니다.”라고 하였다. 이에 놀란 최경창은 “그래! 내가 바로 고죽이니라.”하였다.
홍랑은 마주보고 있는 사람이 고죽인줄 전혀 모르고 한 말이었다. 최경창과 홍랑의 운명적인 만남은 이렇게 시작되었다.
잔치가 끝나고 최경창은 부임지인 경성으로 가면서 홍랑을 데려 갔는데 아마 두 사람은 첫 눈에 서로 반해 사랑의 감정이 싹튼 것으로 생각된다.
이 기록은 남학명(南鶴鳴, 1654~?)의 문집인 <회은집, 晦隱集>에 잘 기록되어 있다.『계유년(1573년) 가을에 내가 북도평사로 부임해 갔을 때 홍랑이 따라와 부임지에 있었다.』 (萬歷癸酉秋 余以北道評事赴幕 洪娘隨在幕中) - <회은집>
당시 서른 다섯살의 최경창과 그 보다 훨씬 어렸던 홍랑의 만남. 이 두 사람은 최경창의 근무지인 경성에서 함께 지낸 것으로 보여진다. 그러나 사랑의 길은 평탄하지 않은 법. 둘의 첫 만남은 짧았던 것으로 보인다. 곧바로 이별이 찾아 온 것이다.
최경창이 임기가 다 되어 서울로 돌아가게 되었으니 홍랑에게는 청천벽력 같은 일이었다. 당시 관기란 노비와 다를 바 없는 신분이었기에 본처가 있는 고죽을 따라 갈 수도 없었다.
홍랑은 조금이라도 더 그와 함께 있기를 원하여 서울로 가는 최경창을 배웅하며 경성에서부터 멀리 떨어진 쌍성(雙城)까지 태산준령을 넘고 넘어 며칠을 마다 않고 함께 갔다.
그러나 두 사람은 이윽고 함관령(咸關嶺)고개에 이르렀고, 더 이상 지역 경계를 넘을 수 없었던 홍랑은 사무치는 정을 뒤로 하고 돌아 설 수 밖에 없었다.
『다음 해 봄, 내가 서울로 돌아갈 때 홍랑이 쌍성까지 따라왔다가 거기서 헤어져 돌아갔다.』(翌年春 余歸京師 洪娘追及雙城而別還) - <회은집>
눈물을 삼키며 돌아서던 홍랑의 눈에 산버들이 보였다. 홍랑은 버들가지 하나를 꺾어 시조 한 수를 적은 서찰과 함께 고죽에게 보낸다.
한편, 홍랑과 헤어진 최경창은 함관령 아래 한 주막에 들었다. 여기서 그는 서찰 한 장을 받는다. 그것은 한글로 지은 홍랑의 시조 한 수 였다. 최경창과 헤어져 돌아가던 홍랑이 지어 보낸 것이었다.
이 시가 바로 그 유명한 홍랑의 시 ‘묏버들가’ 이다.
묏버들 가려 꺾어 보내노라
님의 손대 자시는 창밖에 심어두고 보소서
밤비에 새잎 곧 나거든 날인가도 여기소서
- 홍랑 -
단 한 번의 만남으로 사랑에 빠졌던 최경창과 홍랑. 그리고, 함관령에서의 애절한 두 사람의 이별은 조선을 대표하는 연정시 ‘묏버들가’를 남겼다.